필리핀의 수많은 섬 중에서도 세부(Cebu)는 유독 미식가들에게 사랑받는 곳입니다. 그 이유는 신선한 해산물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곳에는 오랜 역사와 지역 문화가 깃든 전통 요리가 많고, 그 맛이 깊이 있으면서도 현지인들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부의 음식은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전통,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부의 음식은 여행자에게 있어 하나의 문화 체험이자, 현지와의 진정한 연결 고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세부를 대표하는 전통요리로 손꼽히는 것은 바로 레촌(Lechon), 수툭일(Sutukil), 킬라윈(Kilawin)입니다. 이 세 가지 음식은 맛뿐만 아니라 조리법, 식문화,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까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어, 필리핀 요리를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메뉴입니다.
레촌 – 필리핀 전통요리의 왕좌
레촌은 필리핀 전체에서 사랑받는 음식이지만, 세부의 레촌은 아주 특별합니다. 실제로 많은 필리핀인들은 “레촌은 세부 것이 최고다”라고 말하며, 세부 레촌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레촌은 기본적으로 통돼지를 숯불 혹은 장작불에 천천히 굽는 요리인데, 단순히 구운 돼지고기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세부 레촌은 그 조리과정에서부터 남다른 정성과 기술이 들어가며, 그 결과물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정교합니다. 조리의 첫 단계는 돼지의 뱃속을 채우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레몬그라스, 마늘, 생강, 양파, 월계수잎, 소금, 후추 등 다양한 향신료와 허브가 사용되는데, 이 모든 재료는 단순한 향을 더하는 것을 넘어, 고기의 누린내를 제거하고, 고기 전체에 향을 입히는 역할을 합니다. 이후 이렇게 양념된 돼지는 대나무 장대에 꿰인 채 숯불 위에서 4~6시간 이상 천천히 회전시켜 가며 굽습니다. 이처럼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인 조리 방식은 레촌의 맛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가장 큰 특징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육즙 가득한 식감입니다. 레촌 껍질은 얇지만 바삭하게 튀겨진 듯한 느낌을 주며, 속살은 부드럽고 풍미가 진합니다. 다른 지역의 레촌이 종종 간장 소스나 식초 소스에 찍어 먹는 반면, 세부의 레촌은 소스 없이 먹어도 완벽한 간과 풍미를 자랑합니다. 그래서 “No sauce needed”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자체로 완성된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부에서는 Rico’s Lechon, Zubuchon, House of Lechon 같은 전문점을 쉽게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 Zubuchon은 세계적인 미식가 앤서니 보데인이 극찬한 곳으로, 세부 레촌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곳입니다. 레촌은 보통 특별한 날이나 행사 때 먹는 음식으로 여겨지지만, 세부에서는 일상 속에서도 언제든지 맛볼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기도 합니다. 현지인의 식탁에서도, 고급 레스토랑의 테이블에서도 레촌은 중심을 차지합니다.
수툭일 – 세 가지 요리가 하나로
수툭일(Sutukil)은 단일한 요리를 뜻하지 않고, 조리법과 식문화를 아우르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수툭일은 Sutukil = Sugba(구이) + Tula(국물 요리) + Kilaw(절임 요리) 의 조합어로, 세부 사람들의 해산물 소비 방식이 반영된 전통적인 먹거리입니다. 특히 세부의 해변가 지역에서는 수툭일이 하나의 관광 콘텐츠로 자리 잡았으며,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형태는 막탄섬 근처의 수산시장에서 손님이 직접 해산물을 고르고, 인근 식당에서 수툭일 스타일로 요리를 요청하는 방식입니다. 수조 안에 있는 신선한 생선을 고르고, 이 생선을 세 가지 방식 중 한두 가지 조리법으로 나눠 조리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방식인 Sugba는 생선이나 해산물을 숯불에 구워내는 것입니다. 흔히 참치, 고등어, 오징어, 새우 등을 사용하는데, 불향이 가득한 이 요리는 소금, 식초, 마늘 등을 곁들인 간단한 딥 소스와 함께 먹습니다.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으며,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인상적입니다. 두 번째인 Tula는 생선국 또는 해산물탕과 비슷한 음식입니다. 생강, 토마토, 양파, 칼라만시 등을 넣고 맑은 국물로 끓이는 것이 특징인데, 국물이 시원하고 깔끔해 무더운 세부의 날씨 속에서 특히 인기가 높습니다. 해장 음식처럼 느껴지는 이 국물은 기름지지 않고 개운한 맛이 일품입니다. 마지막은 Kinilaw 또는 Kilaw, 필리핀식 회무침입니다. 신선한 생선을 식초나 칼라만시 주스에 절여 날로 먹으며, 생강, 고추, 양파, 마늘 등과 함께 버무려 내놓습니다. 레몬 대신 필리핀의 칼라만시가 들어가서 독특한 풍미를 자아내며, 특히 한국에서 흔히 먹는 초장회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수툭일은 단지 ‘어떻게 요리하느냐’가 아니라 음식을 즐기는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문화적 요소이기도 합니다. 고기 중심의 필리핀 요리에서 벗어나 해산물의 섬세함을 즐기고, 가족이나 친구들이 함께 나눠 먹는 방식은 세부 사람들의 따뜻한 공동체 문화를 잘 보여줍니다.
킬라윈 – 산뜻함과 강렬함의 경계
마지막으로 소개할 전통요리는 킬라윈(Kilawin)입니다. 킬라윈은 앞서 소개한 수툭일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도 독립적인 전통 음식으로 깊은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동남아 여러 나라의 ‘세비체’나 ‘회무침’과 유사한 음식이지만, 그만의 조리 철학과 풍미로 차별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킬라윈은 주로 참치, 고등어, 방어와 같은 생선을 얇게 썰어 식초 또는 칼라만시 주스에 절이는 방식으로 조리합니다. 여기에 생강, 마늘, 다진 양파, 고추 등을 넣어 무쳐내는데, 기본적으로 ‘화학적 조리’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백질이 산에 의해 익는 이 조리법은 필리핀의 더운 날씨에서 냉장 보관이 어렵던 시절, 신선도를 유지하면서도 요리를 안전하게 즐기기 위한 지혜에서 출발했습니다. 세부에서는 킬라윈을 보다 다채롭게 즐기는데, 생선 외에도 때때로 돼지고기, 염소고기, 심지어 내장이나 껍데기까지도 사용합니다. 특히 푸크푸크라는 생선 내장으로 만든 킬라윈은 현지인에게 인기 있는 별미 중에 하나입니다. 이처럼 킬라윈은 하나의 정형화된 레시피라기보다 지역과 가정, 식재료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음식입니다. 킬라윈은 보통 차갑게 즐기며, 음료나 술과 함께 곁들여 먹습니다. 특히 시원한 맥주와 함께하면 그 산뜻하고 매콤한 맛이 더욱 돋보이며, 애피타이저나 술안주로 매우 적합합니다. 최근에는 건강한 식단을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는데, 고단백, 저지방 식품이면서도 간단한 재료와 조리법으로 만들 수 있어, 비건이나 저탄수화물 식단을 선호하는 이들에게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세부에서의 식도락 여행은 새로운 맛을 경험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닙니다. 레촌의 화려하고 진한 풍미, 수툭일의 다채롭고 신선한 조리법, 킬라윈의 산뜻하고 복합적인 맛은 세부의 기후, 역사, 정서가 녹아든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음식들을 통해 우리는 세부 사람들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맛이라는 감각을 넘어 진정한 ‘문화 체험’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부에 간다면, 깨끗한 해변에서 액티비티뿐만 아니라 소개해드린 전통요리도 함께 즐겨보는 것을 추천합니다.